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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사회_문희

작성자
레드홀릭스
작성일
2014-04-02 16:47
조회
517

영화 <티켓>중

다정한 사회

내가 살았던 암사동은 천호동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작은 동네였다. 1996년 중반에 나는 그곳에 들어섰다. 그때 마주쳤던 암사동의 초상을 한 번 떠올려 본다면 금빛으로 눈부시던 물줄기와 하얀 모래밭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다음으로는 울창한 나무와 흙 냄새가 한없이 용솟음치던 선사유적지를 꺼내보고 싶다. 나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일산 촌놈이었고 주변 정세에 어두웠기 때문에 곧 생기게 될 친구들에게 눈과 발을 빌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내게는 친구가 하나 둘씩 생겼는데, 이상하게도 다들 발 빠르고 활동반경이 넓은 녀석들이었다. 한강과 선사유적지가 질릴 때쯤 친구들이 내게 은밀한 제안을 하나 했는데 저기 천호동 부근에 “좋은 곳(?)” 에 가보자는 것이었다. 그 이전에도 서울에 살아봤으나, 역시 암사동처럼 후미진 망우리가 고작이었고 더군다나 철원, 포천, 일산 등지를 돌아다녔기에 왕복 8차선 도로만 보아도 겁이 났었다. 친구들의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제안을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우리는 2km쯤을 걸어서 천호동에 도착했다.

좋은 곳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던 중에 나의 친구들은 내게 이상한 숫자를 가르쳐 주었는데, 그 숫자는 바로 ‘588’이었다. 588은 우리가 도착할 ‘좋은 곳’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감시원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골목길로 들어가 도착한 588. 마주 보고 서 있는 투명한 창과 창 사이에서 침이 고이도록 만드는 정육점 붉은빛이 작렬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헐벗고 웃음 짓는 예쁜 누나들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TV에서조차 경험한 적 없던 아름다운 여체들의 현현! 진한 화장, 매혹적인 향수 냄새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사로잡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나가는 어린 고추들을 보며 "깔깔”거리고 “같이 놀자.”고 추파를 던지는 누나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마주친 신세계란, 서울 ‘자체’가 아니라, 서울 ‘안'에 자리 잡은 서울의 균열, 서울의 틈이었다.

나는 이전까지 몰랐던 공간이 내 곁에 펼쳐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근접했지만, 그러나 또한 근접하지 않았던 공간. 그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고 다만 조용히 생각하게 되었다. 내 눈에 들어온 서울은 광화문이었고 혹은 어린이대공원이었으며, 아니면 국회의사당, 혹은 63빌딩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서울 그 자체는 하나의 문명이었고 제국이었으며 완전무결한 꿈의 도시였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고 그래서 열심히 일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나는 ‘성’과 ‘섹스’의 차이를 구분하는 판단력을 갖추게 될 때까지, 이 "공간에 관한 환상"을 간직하고 자라났다. 존재하는 모든 것과 공생하기 마련인 균열과 불완전을 알게 될 때까지 말이다.

조선의 한양을 거쳐 대한제국의 수도로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거쳐 지금 대한민국의 서울로 도래하기까지 서울이라는 터전에는 얼마나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나? 그리고 이 장소들이 형성된 역사를 살펴보면 어떤 공간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떤 공간이 인위적인지 알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공간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모든 공간이 인위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을 벗어난 자연스러움과 인간에 의한 행위가 동시적이고 상관적인 관계로 이런 공간, 이런 장소를 구성해낸 것일까?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연(自然)’이란, 본래의 의미처럼 “어떤 인위적인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생태적 자연”의 의미로 그래서 누군가가 내버려두었으나 자연 그 자체의 힘으로, 정말 스스로 그러한 방식으로 구성된 것일까?

에이즈로 생을 마감한 프랑스의 석학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니체의 계보학을 받아들이면서 말한다. 계보학의 목표는 “사물은 어떠한 본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보편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사물의 본질은 이질적인 형식들(서로 다른 어떤 요소들)로부터 조각조각 끌어모으는 방식으로 날조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스러운”, 혹은 “당연한” 모든 것이 사실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토대 위에서 형성된, 만들어진, 날조된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서울을 떠올릴 때 588을 떠올리진 않는다. 청량리의 그곳을, 미아리의 그곳을, 영등포의 그곳을, 천호동의 그곳을 떠올리지 않는다. 우리는 서울을 떠올릴 때, 내가 지금 ‘균열’이라고 부른 것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배제된 서울, 일종의 거세된 서울을 떠올린다. 그리고 더불어 지금 여기서 다시 던져야 할 질문, “내가 지금 말한 균열이 정말 ‘균열’이 맞는 걸까?”

균열(龜裂)이란 ‘터지고 찢어진’ 것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개념이다. 내가 자연스럽게 떠올린 588에 대한 기억과 균열이라는 말이 묘하게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그것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하고 그 공간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그렇다면 시선을 돌려보자, 나는 무엇에 의해 교육받았고 누군가에 의해 교육되었는가? 내가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그 교육의 시작은 어디에서 이루어졌을까? 내 기억 속에서 균열로 떠오르는 그 공간에 거소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간이 균열로 지칭되는 것을 바랐던 것일까? 무엇을 균열이라 부르기로 정할 때 그들은, 혹은 우리는 그 개념의 정의에 참여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같이 정하는 다정한 사회는 될 수 있을까? 내가 정한 성과 섹스가 남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성과 섹스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타인의 인정은 필요한 걸까?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생각 어느 부분까지 정하고, 어느 부분까지 비판할 수 있을까?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오늘날 나의 성과 섹스에 대하여, 그리고 너의 성과 섹스에 대하여, 우리의 성과 섹스에 대하여.

레드홀릭스 글쟁이 @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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